민노씨님 덕분에 새로 사귄 가즈랑님의 집에서 영화에 관한 대화라는 포스팅을 보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 10개를 뽑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갑작스레 포스팅한다.
누구나 다 본 흥행 성공한 영화 말고 내가 보석처럼 여기고 몰래 간직하고 있다고 누군가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영화들로만 모아 보았다. 뽑고 나서 보니 감수성이 예민했던 20대 청춘에 본 영화가 대부분이다. 세월에 따라 영화도 변하고 인생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고 했다. 30대에는 어떤 멋진 영화들이 기억될까.
내 청춘의 보고서 - 중경삼림(1995)
수많은 영화 중 아직도 최고의 영화로 꼽히는 영화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다. 대학 시절 본 당시 센세이션을 일이킨 이 영화는 Mamas & Papas가 부른 California dreaming이란 노래와 낮게 깔리는 주인공의 나레이션,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 사랑에 대한 희망적 메시지가 인상 깊다. 두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영화 중 두 번째 이야기의 왕정문에 반했던 기억이 난다. 스튜디어스였던 떠난 애인을 잊지 못하는 양조위에게 몰래 찾아가 그녀의 흔적을 지우는 모습이 무척 슬퍼보였다. 지금 봐도 너무나 스타일리시한 영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 화양연화(2000)
가장 많은 필름을 소모하기로 유명한 왕가위는 그 중 멋진 장면들을 편집하여 스토리를 구성해가는 특이한 스타일의 감독. 그만큼 화면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불륜을 이만큼 아름답게 묘사한 영화가 있을까. 중국풍의 꽉 죄는 옷을 쭉 입고 나오는 장만옥의 무정한 정숙함과 우유부단하여 사랑을 방치하는 양조위을 보는 마음은 왠지 아프다. 이 영화를 본다면, 아마 며칠은 이들이 사랑했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귓가를 맴도는 냇킹 콜의 "Quizas, Quizas, Quzas"와 함께 말이다. 두 번 봐도 멋진 영화다.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 - 타인의 취향(2001)
취향은 선택의 문제일 뿐, 맞고 틀리는 진위나 가치의 문제는 아니므로 모두의 취향은 존중되어져야 한다고 프랑스의 사회학자 삐에르 부르디외가 그의 책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을 통해 말했단다. 취향이 없는 사람이란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란 뭔가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취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사랑은 취향이야'라고 말하며, 또, '사랑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라고도 한다. 각양각색의 개성과 취향을 갖고 있는 각각의 사람들 속에서 과연, 자신의 취향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혹 타인에 의해 강요된 것은 아니었는지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다.
행복이 바이러스처럼 번진다 - 아멜리에(2001)
누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아멜리에는 깜깜한 극장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훔쳐보는 것을 좋아하고, 물수제비 뜨는 것을 좋아하며, 곡식자루에 손가락 찔러넣기를 좋아한다.^^
아코디언음악처럼 경쾌하고 영화의 주조를 이루는 빨간색처럼 밝고 환한 영화, 아멜리에를 보면 우리의 인생도 결국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다시한번 생각케한다.
영화에서 아멜리에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벌이는 갖가지 사건들 - 연애편지 대신쓰기, 보물상자 찾아주기 등 -과 착한사람들을 괴롭히는 과일가게 주인을 괴롭히는 기상천외한 사건들 - 술병에 소금치기, 슬리퍼 사이즈 작은걸로 바꿔놓기, 치약과 무좀약 바꿔놓기, 전화 메모리 번호 섞어놓기 등 - 을 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번지고 행복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 맘이 마구마구 생겨나는 영화다.
사랑을 건조하게 직시하다 - 봄날은 간다(2002)
허진호 감독은 이영애와 유지태라는 대스타를 그냥 그저그런 남녀로 전락(?)시켜버리는 재주를 가진듯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심은하와 한석규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상우의 말도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잊지 못하는 부분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은수가 다시 상우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마음은 그녀를 향하면서도 차마 그 손을 잡지 못하고 흔들던, 뒤돌아본 은수의 모습이 상우의 눈물로 흐려지던 그 장면이다. 그 장면이 가장 슬프고 인상적이었다. 정말로 사랑이 끝난 것이다.
잘 짜여진 공상 과학 영화 -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헐리웃 영화는 잘 보지 않지만 SF영화는 좋아하는 편이다. 저명한 공상과학소설가 필립 K.딕의 단편소설을 근거로 한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의 명성만큼 치밀한 줄거리도 훌륭하지만 렉스턴의 근육질 미래형 자동차, 영상을 자유자재로 편집하는 기법, 가상 체험, 다양한 무기, 새로운 개념의 도로 등 훌륭하게 미래를 창조해 낸 그 훌륭함에 박수를 보낸다. 결코 돈이 아깝지 않은 훌륭하고 매끈한 영화.
신선한 시도, 그러나 가볍지 않은 - 고양이를 부탁해(2002)
나는 여성감독의 영화에서 때때로 많은 것을 공감하고 얻는다. '미술관옆 동물원'이 그랬고, '타인의 취향'이 그랬다. 화려하거나 스케일이 크지는 않지만 치밀하고 예민한 구성의 영화를 좋아한다. 2002년 당시 조폭영화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좋은 한국영화에 대한 재상영 운동 덕택에 선재아트센터에서 운좋게 볼 수 있었던 이 영화는 신인이었던 정재은 감독과 젊은 스탭이 그려낸 젊은 영화라서일까 영화 곳곳에 신선한 시도(영상에 자막이 타고 흐르는 기법 등)가 많다.
태희 역의 배두나는 극 중 가장 적절한 배역이 아니었나 싶다. 태희가 친구 지영에게 '난 네가 사람을 도끼로 찍어죽였다고 해도 너 믿어.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왜 그렇게 울컥 하는 기분이 들던지. 스무살 그 시절 우리들의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결혼에 가볍지 않은 통찰 -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
최근 쌍화점으로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유하 감독의 시나리오라는 점에서, 결혼에 대한 결코 가볍지 않은 통찰이 돋보인 영화. 사랑하면 과연 결혼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결혼하면 사랑의 환상은 깨지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과연 그녀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가. 결혼은 정말 사랑의 결실이 아닌 사람들을 메마르게 하고 삭막하게 만드는 것인가. 이 영화는 결혼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답을 내리고 있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결혼전에 봤을때도, 결혼 7년차인 지금도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냉소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유하의 시선이 공감이 가는 간다. 배우 엄정화의 발견 또한 수확 중 하나.
서늘한 붕괴가족의 앙상한 기운 - 바람난 가족(2003)
바람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사회문제인 우리나라에서 시어머니부터, 며느리, 아들까지 총체적으로 바람이 난 영화로 화제를 일으켰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과감한 성적 노출을 보여준 임상수 감독는 이 영화에서 더욱 과감하고 진일보한 관점을 보인다. 이 영화 속의 문소리(호정)는 참으로 매력적이고 쿨한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후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에 종속적이거나 얽매이지 않고 자기 주체적이고 쿨하고 독립적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싱글즈의 동미가 그렇고 질투는 나의 힘에 배종옥이, 그리고 이 영화 바람난 가족의 문소리가 연기한 호정이 바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남편의 말처럼 '아내에게 절대 보여줘서는 안돼는 영화'다.
과거는 당신의 미래다 - 미스틱 리버(Mystic River)(2003)
린트 이스트우드의 의심할 여지 없는 걸작. 오랜 경험을 통해 섬세한 연출을 자랑하는 이 노장 감독은 배우로서의 능력도 뛰어나지만, 연출을 맡을 때 더욱 빛이 난다. 숀펜의 아내 역을 맡은 로라 리니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부른다면, 시나리오가 전화번호부라고 해도 달려들 것이다."고 말했다지.
40대 완숙기에 접어든 배우들은 주연, 조연 빠질 것 없이 모두 훌륭한 연기를 토해낸다. 그러고 보면 40대도 참 매력있는 나이로군. 숀 펜, 팀 로빈스, 케빈 베이컨. 이들 세 인물을 중심으로 유년 시절에서 성인이 된 현재의 시간까지 그들에게 드리워진 인과의 슬픈 운명을 힘있게 보여주고 있다. 미스틱 리버는 보스턴 시가지를 흐르는 강의 이름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혼돈과 공포를 끌어안고서 유유히 흐르는 강이 마치 우리 삶을 의미하는 것 같다. 우리 회사 부사장님에게 추천해서 아주 좋다는 평을 들었지 ^^
세련된 미스테리 스릴러 - 올드보이(2003)
유지태의 절제된 연기, 최민식의 폭발적 카리스마, 박찬욱의 적절한 상업주의. 올드보이는 그렇게 딱 삼박자가 맞아 떨어진 '세련된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다.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도 좋다.
영화의 완성도 이외에도 나는 최민식, 유지태 두 배우의 아우라, 그것들간의 친밀한 결합,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다시피한 변신 등에 더 많은 관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이 영화를 위해 몸무게를 십여킬로나 뺐다 찌웠다 하고 불혹의 나이에 멋진 베드신을 소화한 최민식, 그리고 올백머리를 하기위해 머리를 한 웅큼씩
빠져야했고 메뚜기 자세를 소화하기 위해 수 개월간 요가를 배우고, 대 선배와의 맞연기 대결이라는 엄청난 중압감에서도 적절히 자신을 컨트롤했던 유지태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멋진 넘들 삼종세트 ^^
유쾌한 그러나 눈물의 의미를 아는 - 쿵푸허슬(2004)
주성치를 그리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매력은 겉은 유치찬란하고 만화적인 면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속은 따뜻한 인간미와 알짜배기 재미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주성치의 영화에 환호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코드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 그 공감대를 같이 나누고 싶어하지만 나는 크게 공감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쿵후허슬은 주성치 영화의 핵심인 만화적인 유머와 패러디(어떻게 보면 무척 유치한 ㅠㅠ)가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
어린 청춘들의 애잔한 러브레터 -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2004)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영화 중 하나. 조제는 청춘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어린 연인들의 애잔한 러브스토리다. 사랑과 함께 이별도 언제나 우리의 연애 속에 잠재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다시 고독해진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담담한 이야기. 소설로 읽어도 아주 좋다.
영화의 중간중간 멈춰지는 풍경과 공간들은 대부분 스틸사진으로 제시되는 것도 독특하다. 거기에는 나타난 사진들은 모두 어딘가 불완전하지만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나 그 사진에 찍힌 사람이라면 이것들을 보면서 특별한 감흥에 젖을 것이다. 그것이 사진의 본질이고 또한 추억의 본질일 테니까.
득도한 천재감독의 여유- 자토이치(2004)
이 영화를 떠올리면 흥겨운 리듬이 떠오른다. 밭을 가는 농부들이 한번 삽질을 할 때마다 그 소리는 음악이 되고, 그 음악을 따라 사무라이 행렬과 맹인 검객의 더듬거리는 발걸음이 나아간다. 감독이 일본의 유명한 탭댄스 그룹에게 엔딩을 완전히 맡겼다는, 마을 사람들은 악당이 사라진 걸 축하하는 축제에 모여 나막신을 딸그락거리며 대규모 탭댄스를 추는 장면이 가장 압권이다.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기타노 다케시의 이 영화는 확실히 오락영화이지만 배우로서의 비트 다케시를 포함해, 기타노 다케시에게서 일종의 '여유'가 느껴진다.
어른들은 모르는 도시의 슬픈 동화 - 아무도 모른다(2004)
막내 유키의 죽음 뒤에도 곧바로 이어지는 그들의 삶은 무엇하나 그 이전과 변한 게 없다. 전기와 가스, 물이 여전히 끊겨있고 이전과 변함 없이 남겨진 세 남매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저 살아가야 할 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먹먹해진다. 고작 열네살에 칸 국제영화제 최연소 최우수 연기상을 받은 맏이역의 아키라의 눈빛이 쉬 잊혀지지 않는다.
2002년 개봉해 주목받지 못했던 이 영화가 내가 사랑하는 영화관 시네큐브 광화문에서 재개봉했을때 봤다. 도대체 이토록 스타일리시하고 유쾌한 영화가 일반 관객들에게 주목 받지 못하고 사라졌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유난히 트렌스젠더에 한국의 보수적인 분위기 탓일까? 아니면 감독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서일까?
주인공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무거운 주제와는 달리 이 영화는 흥겹고 재미있다. '최고의 록 뮤지컬'이라는 세계적인 찬사에 걸맞게 인상적인 비주얼과 맛깔나는 음악, 그리고 영화를 탁월하게 풀어나간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에서 묻어 나온다. 무엇보다 영화 내내 귀를 즐겁게 하는 중량감 있는 록 음악은 만족도를 배가시켜 준다.
@그 밖에 보고 싶지만 보지 못한 영화들: 원스, 내 생애 최고의 순간, 추격자, 렛미인 등등
언제 한번 민노씨님처럼 내 인생의 책들에 관해서도 포스팅을 해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여러분들의 청춘에는 어떤 영화가 기억되어 있나요? 릴레이로 하자면 두려워할 사람 많겠다. ㅎㅎ (누구 자원할 사람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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