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번 요상하다. 이건 또 뭔가. 간단히 말하면 좋아하는 채소에 대한 변호와 역겨운 바다표범 (오일)에 대한 좋지 않은 추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 생각할 수록 절로 웃음이 난다. 하루키의 다른 수필처럼 이 책에서도 대단한 인생에 대한 열정이나 조언도 없이 이상하고 엉뚱하고 시시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기대를 크게 갖지 않고 그저 푹신한 소파에 눌러앉아 땅콩이나 까먹으며 읽어도 좋을 만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이 3년간의 장편 소설 '1Q84'를 탈고한 직후 그의 가장 최근의 일상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라면 조금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진지하고 무거운 소설을 쓰던 사람이 20대 여성이 보는 패션잡지인 <앙앙>에 '무라카미 라디오'란 칼럼을 연재를 할 수 있단 말인가.(2000년에 출간된 <무라카미 라디오>의 후속편)
이 책은 그래서 밝고 유쾌하고 가볍고 가끔은 엉뚱하다. 뭐 인생에 심각한게 뭐 있나? 하는 투지만 서문에서는 귀엽게도 이런 엄살을 부리며 독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있다.
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 하는 사람도 많으니, 이왕 그렇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하겠습니다. (p 6~7 서문 중에서)
간단한 요리일수록 섬세함이 필요한 법이다.먼저 무엇보다 시저스 샐러드에는 아가씨처럼 싱싱하고 신선한 로메인상추가 필요하다.토핑은 크루통과 계란노른자와 파르마산 치즈로, 간은 질 좋은 올리브유, 다진 마늘, 소금, 후루, 레몬즙, 우스터소스, 와인비네거로, 이것이 정통 레시피다. 어떤가. 상당히 담백할 것 같지 않은가.
-p.50 시저드 샐러드 중에서
나는 원래 소설가여서 소설 쓰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중략) 거기에 비해 에세이라는 것은 내 경우, 본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취미도 아니어서 누구를 향해 어떤 스탠스로 무엇을 쓰면 좋을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대체 어떤 걸 쓰면 좋을까 하고 팔짱을 끼게 된다.그렇긴 하지만 내게도 에세이를 쓸 때의 원칙, 방침 같은 건 일단 있다. 첫째,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 둘째,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 섯째,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P.34 에세이는 어려워
LP판을 수집하는 것과 섹스를 하는 수와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교묘하게 연결시키기도 한다. 허를 찌르는 비유가 절묘하다.
LP판(혹은 마음을 쏟는 대상)을 수집할 때의 문제는 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그걸 이해하고 사랑하는가, 그런 기억이 당신 안에 얼마나 선명히 머물러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진짜 의미일 것이다.
- P.123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그의 이십대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그리 행복하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는 새로운 발견도 했다. 생활고에 시달린 하루키의 20대? 상상하기 어렵다.
나의 이십대는 상당히 정신없고 바빴다. 그 십년간 느낀 것이라면 매일 열심히 일한 것 항상 빚에 시달린 것, 많은 고양이를 기른 것, 그 정도다.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 그런 의문조차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P. 183 이쪽 문으로 들어와서
책을 좋아하지만 책에 집착하지 않는 점도 맘에 든다. 음..뭔가 쿨하달까 ㅋㅋ
그래도 가끔 책장에서 거듭된 이사에도 살아남은 오래된 책의 책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렇구나, 나라는 사람은 결국 책에 의해 만들어졌구나' 하고 새삼 느낀다. 어쨌든 다감한 청춘 시절, 책을 통해 받아들인 압도적인 정보로 여기 한 인간이 완성됐다.
P.136 책을 좋아했다
자신의 나이듦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수긍하는 여유로운 모습도 보기 좋다.
소설 못지않게 사랑하는 음악에 대한 애착도 엿볼 수 있다. 음악이든 소설이든 상처받은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점에서 정말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은 때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 속 고통이나 슬픔도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 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 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p. 219 베네치아의 고이즈미 교코
책을 넘길 때마다 책갈피처럼 맨 하단에 한줄 씩 촌철살인의 위트있는 유머가 한줄씩 쓰여 있는데 이걸 읽는 맛도 쏠쏠하다.
- 지바 현에서 '굿럭'이라는 이름의 러브호텔을 보았습니다. 애쓰십시오.
- 일본에서 던킨 도넛이 사업을 철수하고 긴 세얼이 흘렀다. 국가적 비극이다.
내가 하루키를 처음 접한 것도 스무살 여름이었다. 역시 하루키의 에세이는 여름에 읽어야 제맛이다. 왜 그럴까 잠시 생각해봤다. 그의 글에는 푸릇푸릇한 여름의 냄새가 난다. 늙지 않는 젊음...나이들지 않는 감성. 다소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부럽다.
여름의 향기를 느낀 건 오랜만이었다. 바다 내음, 먼 기적소리, 여자의 피부 감촉, 헤어 린스의 레몬 향, 저녁 무렵의 바람, 엷은 희망, 그리고 여름날의 꿈… 그러나 그것은 마치 어긋나 버린 트레이싱 페이퍼처럼 모든 게 조금씩,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옛날과는 달라져 있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9)
하루키의 에세이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소중함을 만끽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안그래도 무거운 우리 인생에서 이정도의 투자로 가벼운 위로 하나쯤 얻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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