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영화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잠시 상영되고 사라지는 것이라 다시 스크린에서 만난다는 것은 정말 운이 좋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영화라면 더욱. 서울에서는 다행히 이런 시네마데크(영화(cinema)와 도서관(bibliotheque)의 합성어인 '영화 도서관') 형태의 영화관이 제법 자리하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내가 사랑하는 시네큐브 광화문 외에도 대학로의 하이퍼텍 나다, 이대의 아트하우스 모모, 신촌의 필름포럼같은 예술영화 전용관에, 홍대의 시네마 상상마당같은 독립영화 전용관 등이 그것이다.
특히, 스폰지하우스는 새로운 감성의 영화들과 애니메이션들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마니아들의 사랑을 듬뿍 얻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일본 멜로 영화 기획전을 만나다니 정말 기분 좋다 ^^
2004년 개봉할 때 보고 7년만에 다시 만난 이 영화. 당시 영화를 보고나서 타나베 세이코의 원작 소설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수천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에 발탁된 시츠네오 역의 츠마부키 사토, 조제(쿠미코) 역의 이케와키 치즈루, 그리고 한국에 제법 알려진 카나에 역의 우에노 주리까지. 이 3명의 풋풋한 청춘들이 그려내는 시리도록 아름답고 쓸쓸한 러브스토리.
당시 내 홈페이지에 소개한 나의 감상평은 이정도! [관련 글- 내 청춘의 아름다운 영화 16선]
어린 청춘들의 애잔한 러브레터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4)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영화 중 하나. 조제는 청춘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어린 연인들의 애잔한 러브스토리다. 사랑과 함께 이별도 언제나 우리의 연애 속에 잠재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다시 고독해진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담담한 이야기. 소설로 읽어도 아주 좋다. 영화의 중간중간 멈춰지는 풍경과 공간들은 대부분 스틸사진으로 제시되는 것도 독특하다. 거기에는 나타난 사진들은 모두 어딘가 불완전하지만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나 그 사진에 찍힌 사람이라면 이것들을 보면서 특별한 감흥에 젖을 것이다. 그것이 사진의 본질이고 또한 추억의 본질일 테니까. |
# 1. 누구에게나 특별한 첫 사랑, 절제되고 섬세한 감정
우리는 누구나 첫사랑을 통해 설레이는 사랑의 시작, 빛나는 시간들, 점점 일상속에서 시들어가는 감정, 그리고 조용하고 담당한 이별까지를 경험한다. 그 사이클 속에서 처음에는 초라하고 여리게만 보이던 조제가 당당하게 자신을 잃지 않고 더욱 강해지는 모습을 보면 코 끝이 시큰해질 정도다. 처음에는 못생긴 장애인 아이로 보이던 조제가 차츰 사랑스런 아이로 변해가는 과정은 실로 놀랍기만 하다.(설마 성형을 한건가 ㅎㅎ)
상처 뿐인 어린 시절부터 자존감이 강했던 아이, 오이지와 계란말이, 생선 구이, 된장국을 정말로 잘 만드는 아이, 자신을 지켜내는 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강한 아이,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헌신적이고, 이별에는 한없이 쿨하게 대처하는 그녀. 나는 그녀가 사랑을 대하는 용감한 태도가 참 좋다.
# 2.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금은 독특한 이 영화의 제목 속에 모든 스토리가 함축되어 있다. 조제는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 『한달 후 일년 후』에서 따온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할머니가 그녀를 위해 동네에서 주워다 준 책이다. 호랑이는 조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같이 보겠다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동물, 즉 세상이다. 그녀에게 츠네오만 있으면 장애인으로서 자신의 처지쯤 무섭지 않은 것이다. 물고기들은 조제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뜻한다. 츠네오로 인해 깊고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쳐 나왔지만, 또 다시 혼자가 되리라는 예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자니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어.눈 감아 봐. 뭐가 보여? 그곳이. 옛날에. 내가 있던 곳이야. 깊고 깊은. 바다 밑바닥, 난. 그곳에서 헤엄쳐 올라온 거야. 처음부터 나는 그렇게 깊은 바다 속에 혼자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외롭지는 않아.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
언젠가 자기가 없어지게 되면 미아가 된 조개 껍데기처럼...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하지만...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아.
# 3. 담담한 이별, 그리고 홀로서기
장애인인 조제와 1년간의 동거를 하면서 조금씩 지쳐가는 츠네오. 그리고 점점 이별을 예감하는 이들. 그렇게 사랑은 조금씩 빛이 바래가고 이별은 한발짝씩 이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기억은 추억이 된다. 왜 그와 헤어졌냐고 물으면 특별한 이유를 말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가 싫어서도 아니고 미워서도 아니고 지겨워서도 아니고. 다만,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연애의 본질이다.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별의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아니, 사실은 하나다. 내가 도망쳤다.
끝내 츠네오가 조제와 헤어져 나오면서 거리에서 주저앉아 통곡했지만(어린 그에게는 버거운 사랑이었이다.), 끝까지 조제의 표정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제는 츠네오의 등 대신에 전동 휠체어로 혼자 장을 보고 오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비춰줄 뿐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장면이 더욱 뇌리에 깊이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볼 땐 이게 마지막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두번째 보니 부엌에서 생선을 굽는 뒷모습과 꽝! 하고 다이빙하며 내려오는 모습이더군.ㅋㅋ)
마지막으로, 감독은 츠네오가 조제를 위해 주워다 준 프랑소와즈 사강의 후속 소설인 『멋진 구름』에서 조제가 흞조리는 이 대목을 통해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언젠가 그대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게 될거야"
라고 베르나르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게 되겠지.
우리는 또 다시 고독하게 될 거야..
그렇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
거기엔 또 다시 흘러가버린 1년이라는 세월이 있을 뿐인 것이지.
"그래요 알고 있어요" 라고 조제가 말했다
> 공식 사이트: http://www.jozeeto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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