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영화다. '여자 정혜'를 볼 때도 그랬지만 이윤기 감독의 영화는 참 정적이다. 주인공 감정의 변화도 너무나 미세하여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한다. 공간도 집밖을 벗어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제작비는 절감될듯 ㅎㅎ)
이렇다 할 사건도 없고, 애정 씬도 없고, 대사도 별로 없는 그야말로 심심하기 그지 없는 그의 영화가 왜 해외 영화제에서만 주목을 받는 것일까? 군 입대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현빈과 충무로가 사랑하는 여배우인 임수정을 캐스팅할 수 있었던 것도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 공식 초청작으로 초대될만큼 이 감독의 작품성에 대한 배우들의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너무 지루하거나, 너무 섬세하거나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이 평도 크게 엇갈린다. 너무 지루하다 혹은 매우 섬세하다.
출판일을 하는 아내와 건출 설계를 하다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남편. 5년을 함께 산 남편 지석(현빈)에게 출장길에 '나, 나갈거야'라고 이별을 통보하는 아내 영신(임수정). 이윤기 감독의 영화 속 그녀들은 언제나 이렇게 상처받고 차갑고 건조하며, 자신의 감정을 꽁꽁 감춘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이미 다른 남자(하정우가 목소리 출연한다)가 있고, 그걸 남편에게 숨기지 않는 뻔뻔한 그녀. 출장에서 돌아온 그녀가 저녁에 집을 나가기 위해 짐을 싸는 그 하루 정도의 시간이 이 영화의 전부다.
떠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저녁에 식당을 예약하고, 폭우로 가지 못하게 되자 다시 묵묵히 파스타를 만들고, 담뱃재를 치워주고, 아끼는 찻잔을 꼼꼼히 싸주는 그. 그러다 양파를 썰다가 마침내 눈물을 보이는 그가 애처롭게 느껴진다. 그는 정말로 그녀의 이별 선고를 납득한 것일까, 아니면 어쩔수 없이 수긍한 것일까.
이 영화에서는 절반 이상이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어두운 실내, 두둑두둑 빗소리, 예민한 배우들이 표정, 섬세한 연출이 참 인상적인 영화다. 남편의 도움 없이는 비가 들이치는 덧문을 제대로 닫지도 못하고 손톱깎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녀는 왜 그를 떠나려는 것일까. 그동안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불친절한 감독은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아이가 없는 5년이란 결혼생활동안 사랑이 점점 식어갔겠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왕가위의 영화 중경삼림에서 “내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라는 대사가 생각나는 지점.)
영화 후반부에 옆집 치과의사인 김지수 부부가 깜짝 등장해 집 나간 고양이를 찾으러 오는 사건 이외에는 '멋진 하루'처럼 이렇다할 사건이나 등장인물이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신이 고양이 '하루'에게 '괜찮아..괜찮아질거야'라고 되뇌이는 것은 자신을 향한 다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나면 남는 것은 그 집을 떠돌던 공기다. (파주의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할 정도라면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도 아닐텐데) 줄거리에 집착하지 않고, 호기심을 줄이고 그저 이별을 앞둔 두 남녀의 감정에만 집중해본다면 더 많은 것이 보이는 영화가 될 것이다.
버릴 건 미련없이 버려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네..(지석) 그거 참 의미심장한 말이네(영신)
당신 참 나이스 해~~ 참 좋은 사람이야~~ (영신)
괜찮아...다 괜찮아 질거야..정말 (영신)
[덧] 나는 결코 이 현빈때문에 이 영화를 본 것이 아니다. 이윤기 감독을 좋아해서다.
[덧2] 영화의 원작은 일본 이노우에 아레노의 소설 "돌아올 수 없는 고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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