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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우아한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

by 미돌11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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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가 추천한 책, 인도계 이민 2세대 박사학위 재원인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여성 작가, 줌파 라히리의 단편집 <축복받은 집>을 담백한 북클럽 5기 선정도서로 읽었다.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차 있어 하루에 한편씩 곱씹으며 읽게되는 단편의 함량이 놀랍다. 
짧지만 강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맛보는 느낌, 진한 여운을 남기며 끝나는 느낌이다. 
평범한 일상의 서늘한 문장을 읽다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다가 끝내 눈물을 툭 하고 쏟고 마는 그런 책이다. 
32살에 낸 이 첫 소설집으로 무려 퓰리처상을 수상하다니 정말 놀랍다. 

단편 하나나하나가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고 영화 같다는 느낌이고 제목도 모두 딱 적절해서 좋다.  
'상실과 그리움'의 정서, 작고 세밀한 이야기로 보편성을 획득 한 뒤 우리의 삶까지 성찰하게 만드는 위대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슴슴한 풍경화 같은 단편들 속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닌 평범한 일상 속 서늘한 문장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쏙 빼고 만다.

결혼의 무모함, 전쟁과 인류애, 인간과 사랑에 대한 이방인의 복잡한 정서를 촘촘한 묘사로 우아하게 완성해낸 위대한 작가, 그녀의 재능이 부러워 😄

북촌 한옥마을 지우헌에서 열린 담백한 북클럽 5기 세번째 모임. 


인상적이었던 단편과 구절을 꼽아보자면, 

<일시적인 문제>
결혼이나 인간관계에 실망한 부부가 단전이란 상황에서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비밀을 터놓게 되면서 제목처럼 일시적인 문제로 위기를 해결했을지 재결합했을지 열린 결말이 궁금해지는 소설. 

"우리 아이는 사내아이였어. 머리털은 검정색이었지. 몸무게는 2.3킬로그램 정도였고. 손가락은 꼭 오므리고 있었어. 당신이 잠들었을 때처럼 말이야." 두 사람은 이제 자신들이 알게 된 사실 때문에 함께 울었다. 

<축복받은 집>
부모의 소개로 만난 캘커타 출신 신혼부부의 문화와 취향 차이로 삐걱이는 상황.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말이 잘 안 통했다. 알게 된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가 결혼한 여자, 지금 인생을 함께하는 여자가 말이 잘 안통하는 것이다."

<질병통역사> 
가이드 겸 질병통역사 주인공 남자가 '낭만적'인 직업이란 부인의 말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외도 고백에 충격을 받다. 

   "다스부인, 당신이 느끼는 건 정말, 고통입니까, 아니면 죄책감입니까?" 
  
<섹시>
'섹시'라는 같은 단어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과 깨달음에 대한 소품 

아줌마는 섹시해요. 로힌이 말했다.
"섹시, 무슨 뜻이니?" "그건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아빠는 알지 못하는 사람, 섹시한 사람 옆에 앉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엄마 대신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어요."
"이건 그녀에게도 그의 아내에게도 공정하지 않으며, 자신과 아내 모두 더 나은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더 끌고 가는 건 온당치 않다고 말해줄 생각이었다."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인도와 파키스탄 분리독립의 전쟁을 치르는 시기에 순수한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한 인간의 상실과 그리움을 옷차림에 대한 묘사와 세밀한 심리 묘사로 '인류애'를 느끼는 순간이 탁월함. 

"피르자다 씨가 인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 나는 좀 더 주의 깊게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무엇이 다른지 알아내려 애썼다. 나는 호주머니 시계가 다른 점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날 밤 그가 시계의 태엽을 감고 커피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을 보았을 때, 낯선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에게는 다카에서의 삶이 우선임을 깨달은 것이다. 파르자다 씨의 딸들이 잠에서 깨어나 머리에 리본을 묶고, 아침 식사를 기다리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우리의 식사와 우리의 행동은 이미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의 그림자일 뿐이고, 피르자다 씨가 정말로 속한 곳의 뒤늦은 허상일 뿐이었다." 59쪽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 
인도 태생인 아버지가 미국에 정착한 과정을 바탕으로 쓴 소설. 크로포트 부인과의 인연, 아내와 정착해 아들을 대학에 보낸 시점의 소회가 인상적이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선 '평범한 영웅'이란 것을 일깨줘준다.  

"메사추세츠가를 지나갈 때마다 차의 속도를 줄이고서 크로프트 부인이 살던 거리를 가리키며 아들에게 말한다. 내가 미국에서 처음 살았던 집이 있던 곳이라고. 그 집에서 백세 살 먹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기억나요?” 말라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는다. ~ 아들이 좌절할 때마다 나는 아들에게, 이 아버지가 세 대륙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면 네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고 말해준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것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은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도 있다." 309쪽



이방인의 정서에 대해서는 나도 가끔 63빌딩과 더 현대서울 빌딩이 지나가는 광고 영상을 볼 때면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 가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 깊이 공감했던 작품이었다. 


"인도계 미국인 여성 작가라는 복합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에 섬세한 정서 묘사가 일품인 작가다.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우아하고, 가시처럼 아릿한 문체로 써내려간다. 내 인생 소설." - 임경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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