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 미도리란 닉네임을 정할만큼 애정했던 내 부동의첫사랑 하루키 상은 어느새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물론 그만큼 나도 늙어버렸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그가 43년 첫 단편 소설을 발표한 이후 줄곧 마음에 품어왔던 이야기를 기어코 세계관을 완성해버린 집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루키 덕후라기는 약하고 약간의 의리를 다하는 마음으로 나는 767쪽에 달하는 벽돌책을 읽을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코로나 19와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고독해진 사람들을 영혼의 역병을 치유하는 스토리.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 안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어주는 주인공 '나'와 그림자없는 도서관장 '고야스'와 사서인 ‘소에다’와 생년월일을 답하면 요일을 맞추는 기묘한 '옐로 서브마린' 소년 등 하루키 소설 속의 독특한 주인공은 여전히 외톨이고 고독하다.
젊은 시절에 자주 하던 성적인 묘사 대신 16~17세 시절 못이룬 주인공인 '나'는 일생에 단 한번 밖에 없었던 사랑에 대한 행복과 저주를 동시에 경험한다.
잘 다니던 출판유통사를 그만두고 작은 마을의 도서관장을 맡게 되면서 '고야스' 씨를 만나는 과정은 전공인 문헌저보학인 나로서는 매우 운명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시대에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이 일본에선 꽤 괜찮은 직업이지만 한국에선 그닥인데 ㅠㅠ
게다가 도서관에는 책이 한권도 없고 대신 사람들의 꿈이 놓여있고 그 꿈을 읽어주는 일을 한다는 설정이 기발한데?!
나는 하루키의 세계관과 함께 탁월한 비유와 산뜻하고 담백한 문장을 사랑한다.
하루키의 소설은 한번 작정하고 읽기 시작하면 시공간을 초월해 몰입할 정도로 읽는 맛은 좋은데 미지의 도시, 변화하는 벽, 무서운 문지기, 호수, 그림자의 존재, 꿈을 읽는 도서관, 신비한 소년 등 상징적인 키워드가 많이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첫사랑, 그림자, 도서관, 비틀스, 클래식과 재즈 등 익숙한 하루키 메타포는 여전히 반갑다.
하루키의 신비하고 몽환적인 감각, 오래된 꿈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잘 느껴진다.
레인코트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세계의 귀퉁이를 맞비비는 소리"라거나 "연애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정신질환"이라고 하는 걸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특히 소설 속에 하루키가 좋아하는 올드 재즈를 들으며 책을 읽으면 그 공간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드는 기분이 든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나만의 도서관이 있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하루키의 독특한 세계관이 특징인 하루키에게 '도서관'은 하나의 꿈이자 현실의 공간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마음속에 나만의 '도시'를 짓고 살아간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그 도시를 확장하고 세상을 재해석하고 상처를 치유받고 삶의 의미를 찾으며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일지 모르겠다.
✅ 인상적인 문장
🔖 "꿈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들,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람.이른바 역병의 씨앗 같은 것들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는 작업이었다. 벽으로 둘러쌓인 한 도시의 와해를 막기 위해. P. 45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가?
사랑을 하기 위한 내 심신의 기능은 아주 오래전에 다 타버린 듯하다.
🔖연애란 보험이 적용 되지 않는 정신 질환이다. P. 287
🔖 시간은 몹시 느릿느릿하게, 그래도 결코 뒷걸음치지 않고 내 안을 통과해 갔다. 일 분에 정확히 일 분씩, 한 시간에 정확히 한 시간씩. 느리게 나아갈지언정 거꾸로 가는 법은 없다. 그것이 그때 내가 몸으로 깨달은 사실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때로는 그 당연한 것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P.137
🔖고독이란 참으로 무정하고 쓰라린 것이랍니다.
하지만 한편 제게는 과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기억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p.452
🔖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 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 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p. 452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그밖에 적어놓은 표현들>
영혼의 잔무처리 p.472
젊고 건강한 식욕 욱여넣다. p473
나 자신의 위치가 저쪽의 이쪽의 경계선 근처 p.495
나인척 하는 내가 아닌 나 p.427
외톨이 정서 p441
본체와 그림자 = 표리일체 p.452
매일 성실하게 달리기를 하며 글을 써온 문학노동자인 하루키가 작품 외에 외부 접촉을 최소화한 일상 루틴도 리스펙할만한다. 내 청춘의 시절부터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는 모두 읽었는데 그것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괜시리 슬퍼졌다.
* 소설의 구조적 측면에서 잘 분석한 이동진 작가의 해설을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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