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에너지가 방전되면 나는 휴가를 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마음이 통하는 가까운 지인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앞에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은 나의 주 활동 근거지인 홍대로 나가 근처에 사는 그린데이님을 만났다. 그녀와는 직장 동료로 4년 가까이 함께 지냈지만, 퇴사 후에 워킹맘으로서의 고충을 함께 나누며 더욱 친밀해진 것 같다. 가까운 곳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가졌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 아닌가 한다.
11월이면 매년 가을 만추 포스팅을 해 왔는데 올해는 이런저런 핑계로 여유가 없어 더 늦어졌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여유는 역시 시간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 법.
CANON 100D Lens 18~55mm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가을이 저만치 꼬리를 남기고 사라져 가고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 카메라를 가방에 챙겨넣고 집을 나섰다. 비를 잔뜩 머금은 낙엽들이 보도블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흩어져 있었다. 오늘 카메라에 담지 않으면 2013년 가을 낙엽은 영영 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셔터를 눌렀다.
오늘은 합정 주민인 그녀가 항상 예찬해마지 않는 버튼업 다이너 앤 카페(http://greendayslog.com/815)를 한번 가보려고 기대를 하고 나왔는데 마침 정기 휴무일이라고 하여 낙심을 하고 대안을 찾아나섰다.
조금 있으니 합정 역에서 상수역 방향으로 '맛있는 교토'가 위치한 그 골목에 'Five Tables'라고 하는 가정식 파스타 집을 찜해 두었다며 나를 이끈다. 입구에 들어서니 에스닉한 내부 분위기가 그린데이님을 닮아 편안하고 소박하다. 이름처럼 테이블이 대여섯개 밖에 없고 천정이 낮은 작고 가게였다. 분위기를 크게 따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리 깨끗한 느낌의 가게는 아니라는 것이 나의 첫인상이었다.
<가게 전경 사진은 그린데이님의 아이폰으로 촬영>
장안의 맛있다는 파스타집을 애써 찾아다니면서 별의 별 가게들을 다 섭렵했지만, 이곳은 매우 독특했다. 우선 1인 키친이 컨셉이다. 주인언니 혼자서 식전빵 손수 굽고, 샐러드 만들고 파스타 볶으면서 피자를 오븐에 굽는다. 빵을 찍어먹는 오일도, 오이와 무 피클도 블루베리 요거트로 나오는 디저트도 모두 맛이 제대로다. 게다가 서빙과 계산까지 혼자서 다 한다. 혼자서 과연 이게 가능한가?
넓고 으리으리한 인테리어에 유명 쉐프로 이름있는 레스토랑도 식어빠진 식전 빵에 성의없는 디저트를 내는 곳이 많은데 이곳은 하나도 허투로 내지 않는 느낌이다. 마치 집에 손님을 초대해 놓고 하나씩 정성스레 음식을 차려 따뜻하게 대접하는 그런 기분이 든달까...
혼자 모든걸 하다보니 혹자는 불친절하다고 불평하기도 한다는데 내 보기엔 입바른 친절보다는 정성스런 음식을 제대로 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문하자마자 재빨리 접시에 얹어내놓는 따끈한 식전 빵이나 내공이 있어 딱 제 맛을 낸 파스타나 피클 접시가 비자마자 채워주는 언니의 센스가 보통이 넘는 곳이다.
그린데이님이 선택한 '알리오 올리오(13,000원)'와 내가 주문한 '구운 야채 빤체타(15,000원)'. 올리브 오일에 볶은 생면에다 매운 고추와 마늘을 듬뿍 넣고 볶은 알리오 올리오도 좋았지만, 버섯, 호박, 가지, 마늘쫑을 넣고 슴슴한 토마토 소스로 버무린 빤체타는 가히 감동적이었다. 아..나는 파스타에 들어가는 마늘쫑과 가지 심하게 좋아하는데 ㅠㅠ 게다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푸짐한 양이라니.
수수한 분위기에다 주변 홍대 파스타 집들에 비해 가격이 다소 비싸다는 말들도 있지만, 디저트까지 포함한다면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는 가격이다. 다녀와서 후기를 보니 이 집은 고르존골라와 오징어먹물파스타가 유명하다고 하니 다음에 꼭 시도해 봐야겠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나온 블루베르와 산딸기를 듬뿍 얹은 요거트. 이게 제대로 감동이다. 입맛을 개운하게 마무리 해주어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이런 스타일 흔치 않은데, 또 다시 찾게 될 것 같다.
디저트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다음에 만나면 상수역 근처의 '힘내라 단팥죽'에 함께 가보고 싶다. 겨울이면 더욱 생각나는 단팥죽.
우리들이 수다를 위해 자리를 옮긴 곳은 나의 아지트인 카페 '이고'. 평일에는 특히 사람들이 적고 한가해서 죽치고 얘기를 오래해도 눈치보이지 않고 편안해서 좋다. 비가 그치고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살도 기분 좋은 오후였다.
우리는 일과 육아의 병행, 아이를 기른다는 것의 어려움, 친정/시댁과의 갈등, 남편에 대한 고마움(가끔 흉 포함),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까지 다채로운 이야기 꽃을 피웠다.
가족이 있어 우리가 이렇게 버틸 수 있고 존재하는 이유가 되지만, 때로 그것이 엄마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구속으로 여겨지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 차 한잔을 앞에두고 결론이 없는 우리의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마무리.
스러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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