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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보내온 윙크 -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

by 미돌11 2024.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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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은 데뷔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이후 15년을 지나오며 삶의 깊은 통찰을 담은 열다섯 편의 단편집이다. 이 책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시간이 우리에게서 가져가는 것들, 우리가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청춘, 예술 사랑 등)이 사라짐을 통해 삶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케이크 단면을 잘라보는 듯한 정확한 순간의 포착과 서정적이고 유려한 문체, 강렬한 사건 전개 등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찰나일지도 모를 오늘도 언젠가 아름답게 사라져갈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2024년 9월 울림터 독서모임 선정도서  
● 제목 : 사라진 것들  
● 저자 : 앤드루 포터(미 트리니티대 문예창작과 교수), 민은영 번역
 출판사, 발행일 : 문학동네, 2024.01.15. 


📕 전반적인 감상 
-미국 소도시에 거주하는 40대 초반의 예술가 남성 1인칭 시점의 고뇌와 번민, 무기력, 공허함, 꿈과 자유의 상실 등을 서술한 것이 특징으로, 이제는 사라진 그 시절의 깊은 유대의 순간을 묘사하며 그리워하는 정서가 전반적으로 드러남. 
-보통의 미국 소설속의 마초적이거나 찌질한 남자가 아니라 예술적이고 섬세한 남자라서 좋았다. 
-틀에 갇힌 삶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해 다소 감성적이고 배부른 투정으로 보일 수 있음.
-단편의 특성 상 명확한 기승전결이 드러나지 않고 결론이 명확하지 않아 답답하기도 함.(단편의 매력!)



“정밀성이 중요합니다. 
뭔가를 정밀하고 명료하게 포착한다면 그게 아름다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아름답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서는 ‘친절함(kindness)’, 작가로서는 ‘솔직함(honesty)’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 아이들에게도 항상 친절하고 따듯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자주 말하곤 합니다.
일상에서 변하지 않는 신념이란 이런 것이에요.  

_ 앤드루 포터 인터뷰 중에서 

 

 인상적인구절    

<오스틴>  파장 무렵의 파티, 얼큰한 취기가 오른 대학 친구들이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이야기
“밤중에 자다가 깨어 뒷마당을, 세탁실을, 차고를 확인하는 일, 이상한
소음의 정체를 알아보는 일, 창문을 단속하고 잠금장치를 다 단단히 채우는 일, 이것이 우리가 들어온 새로운 세상, 우리가 꾸기 시작한 새로운 꿈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꿈에 균열이 생기는 때가 있었다. 과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그 다른 삶이 살짝 윙크를 보내는 때가 있었다.” _ 24쪽

<담배> 젊은 시절에 즐겼던 담배를 아이를 낳고 난 이후에는 이를 즐기는 심야의 여유가 사라진다는 것.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을까?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첫 아이가
태어나면 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_26쪽

<넝쿨식물> ‘나’는 미술가인 여자친구 마야와 작은 차고 아파트에 세들어 살던 시절을 회고
사랑과 예술과 질투라는 단어들로 기억될 그 시기는 그리 길지 않지만,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흔적을 남긴다.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마야가 예술가로서 성공하는 대신 이후 암과 투쟁하는 ‘평범한’ 삶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바로 보통의 삶의 모습일 것이다.

<첼로> 희귀질환 파킨슨에 걸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촉망받던 첼리스트와 남편의 좌절 
"물 흐르듯 유연하게, 마치 몸의 연장인 양, 팔의 일부인 양 움직이던 활을 바라보던 기억, 공연 중 이따금 눈을 감고 자기 안으로 사라지는 듯하던 내털리, 오르내리는 박자에 맞춰 호흡도 빨라졌다가 느려지고, 어떤 순간에는 꿈이나 무아지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환히 밝아지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_ 90쪽

<라인벡> 빛나는 청춘의 시간을 함께 보낸 세 친구의 삼각관계와 그들이 함께 꿈꾸었던 미래 
"당신은 친밀함을 회피하는 사람이야."_107쪽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_ 127쪽

<숨을 쉬어> 아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40대 가장의 한계(고충?) 

<실루엣> 교수 재임용 탈락을 둘러싼 오해, 미묘한 관계 변화를 잘 묘사함. 
"폴과 일레인의 삶을 이루던,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서 빼앗은 그 작은 조각들, 그 하찮은 상징물들, 무단으로 취해 내 것으로 만든 그 사소한 기념품과 증표를 생각했다." _168쪽

<벌> 우울증을 앓는 아내와 실험적 별거를 하던 중 세탁실에 벌이 몰려든 이야기 
나와 정반대인 자기애가 강한 아내의 성향이 연애에선 끌림이지만 결혼생활에는 갈등으로 작용함. 

<히메나> 한 부부의 사이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지만 둘의 관계를 영영 바꿔버린 한 소녀와의 플라토닉한 삼각관계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여대생 헤더가 연상됨.
 

<사라진 것들> 갑자기 사라진 친구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국립공원에서 실종된 친구 대니얼과 그의 여자친구 앙투와네트와 짐을 정리하면서 느끼는 감정.
"(...)대니얼이 없는 내 인생을 상상하기가 벌써 얼마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지 생각했다. 
소중한 나의 친구. 인생의 다른 수많은 일에서는 그토록 운이 좋았으나 한 번의 지독한 일격을 당한, 소중하고 소중한 나의 친구." _325쪽 

 

확장 독서로 2003년 데뷔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역주행으로 읽고 있다.
삶의 분기점에 이르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는 시선, 서정적이고 유려한 문체, 쉽게 잊히지 않는 긴 여운을 남기는 강렬한 엔딩으로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하고, 포워드 매거진, 샌안토니오 익스프레스 등 다수의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됨. 미국 현대 단편소설 미학의 정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음. 


 


분명 시간은 사랑보다 조금 더 오래되었고, 앤드루 포터의 유연한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우리의 가장 친밀한 안타고니스트, 연인이자 적이다. 스쳐가는 의심을 귀신 들린 집으로 만드는 시간, 가장 소중한 희망을 상실이 메아리치는 밀실로 만드는 시간, 가장 강한 마음마저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시간. 그러나 시간과 고통 없이는 영혼도 없을 것이며, 이 이야기들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 _찰스 담브로시오(소설가)

문학이 줄 수 있는 자기 발견의 기쁨과 고통을 앤드루 포터만큼 잘 그려내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더는 외면하고 싶지 않은 이에게, 자기 이야기를 재발견하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그의 차기작을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_최은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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