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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인간의 강렬한 러브스토리 - 너무 시끄러운 고독(보후밀 흐라발)

by 미돌11 202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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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여러 단락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삼십 오년 째 나는 폐지더미에서 일하고 있다"

아름다움 문장, 밀도높은 묘사와 표현이 아주 긴 시처럼 느껴질 만큼 아름답지 그지없다. 결국 없어질 책들과 운명을 함께하는 주인공 한탸의 짧고 강렬한 러브스토리. 밀도가 높고 촘촘해서 결코 만만히 넘어가지 않는 책 #충격결말

주인공 한탸는 35년 간 폐지를 압축하는 노동을 해왔다. 시궁창 같은 지하실에서 생쥐 식구들과 함께하는 열악한 육체 노동 중에도 헤겔, 칸트, 니체 부터 예수, 노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동서양의 고전과 명저를 섭렵하며 "뜻하지않게 교양"을 쌓아간다. 하루에도 몇 리터씩 들이키는 맥주에 취해 지하실에 놀러온 예수와 노자의 환영을 보고, 가끔은 집시여인과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교수나 성당 관리인에게 폐지 더미에서 건져낸 희귀본을 건네주기도 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노동을 매개로 한 인간의 실존을 파고드는 한탸의 이야기는 6장에서 거대한 압축기의 등장으로 큰 전환을 맞는다. 
✏️ 부브니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수압 압축기 한대가 내 압축기 스무대 분량의 일을 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87

자신이 35년간 해왔던 폐지 압축 노동이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그 직감은 곧 현실이 되어 일거리를 잃는다. 이제까지 일을 사랑함으로써 불가피한 파괴 작업에 나름대로 저항해 왔지만 더는 자신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다. 마침내 그는 책들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마음먹는다.

이 책에서 3가지 관점에서 공감을 자아낸 부분은 이렇다.

# 고독
매일 압축기와 술에 젖어사는 고독한 인간 한탸는 스스로를 작은 지하방에 가둔다.

✏️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p.9
✏️ 손에 책을 든 채 수풀 속에 숨은 아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겁에 질린 시선으로 낯선 주변 세계를 둘러본다. 한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p.19

# 독서
쓰레기 더미에서 일하며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한탸는 책을 읽으며 그 사상을 흡수하면서 책이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그를 구해준다.

✏️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 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p.10
✏️ 그런데 밀려드는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책의 등짝이 빛을 뿜어낼 때도 있다. 공장 지대를 흐르는 혼탁한 강물 속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물고기 같달까. 나는 부신 눈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 그책을 건져 앞치마로 닦는다. 그런 다음 책을 펼쳐 글의 향기를 들이마신 뒤 첫 문장에 시선을 박고 호메로스풍의 예언을 읽듯 문장을 읽는다. -p.14

# 노동
✏️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 역시 하늘보다 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p74
✏️ 탈무드의 구절들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p.26
✏️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자리를 바꾸게 할 수 없을 것이다.(p131)

우리는 삶에서 노동과 일상을 분리하려 안간힘을 쓴다(워라밸 이란 용어등장).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하지만 정작 노동하지 않은 삶 또한 허무할 뿐이다.
결국 별다른 쓸모 없는 노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해낸 한탸는 마침내 노동의 주인이 되었다.

빛의 속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사회 변화 속에서 도퇴되는 부적응자는 불가피한가.
도퇴에 대한 두려움과 부적응자에 대한 연민에 대한 이야기일수도.

미래로의 전진이냐
근원으로의 후퇴이냐

결국은 우리 선택의 몫이다.

(덧)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 #체코국민작가 로 이 책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할 정도로 애착이 가장 많은 책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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