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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Story

해지기 전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 비포선셋(Before Sunset)

by 미돌11 2011.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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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멋진 영화를 놓쳤다가 뒤늦게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며칠 전 우연히 쿡TV를 돌려보다가 내가 보게된 영화 비포선셋(Before Sunset)이 바로 그렇다. 비포선라이즈(Before Sunrise)의 후속 편으로 이미 잘 알고 있긴 했지만, 미국 영화평론가 94명이 뽑는 <빌리지 보이스>에서 2004년 최고의 영화 1위로 선정될 정도로 호평받은 줄은 몰랐다.(2003년에는 내가 좋아했던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1위였군 와우!)

잠시도 숨 돌릴틈을 주지 않는 현란한 액션 영화나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가진 로맨스 영화도 아니고, 특수효과가 눈을 사로잡는 환타지 영화도 아니다. 그저 두 배우가 나오고 길을 걷거나 카페에 앉아서 혹은 세느강의 유람선에서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할 뿐이다.


욕구는 삶의 원동력이 아닐까. 원하는게 없으면 행복해진다는 말 알아?
욕구가 있다는 건 건강한거지. 그게 구두든 사랑이든.
불교에선 욕망을 버리라고 하지. 모든 걸 버려야 행복해진다고.
문제는 마음이야.
갖고 싶은 구두를 못가졌을 때 분노를 느낀다면 그게 문제지.
인생은 힘든거야, 고통없인 성숙도 없어.
- 비포 선셋(2004)

이 영화에서 이 두 주인공인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가 나누는 대화 자체가 영화의 주제이자 해설이다. 80분안 이들이 다니는 빠리의 곳곳을 카메라가 그냥 따라다닌다고 보면 적당할 것이다. 둘은 길을 걸으며 이들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비포 선라이즈'는 스물 세살 시절의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는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12시간동안 겪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비엔나, 철교, 두 연극배우, 전차, 진실게임, LP가게, 박물관, 묘지, 저녁 풍경, 키스와 포옹, 놀이기구, 손금쟁이, 카페, 교회, 부랑자 시인, 클럽, 길거리 공연, 식당과 전화놀이, 선상 카페, 돌계단, 포도주 한병, 풀밭, 섹스, 아침, 하프시코드, 눈으로 찍는 사진, 동상, 비엔나 역, 약속과 헤어짐.

그리고 9년 뒤, 서른 살을 지난 두 사람을 빠리에서 재회한다. 둘의 이야기를 책(This Time)으로 써낸 제시는 유럽 팬 사인회 중 파리의 어느 작은 서점에 셀린느가 나타난 것. 이렇게 다시 만난 이들이 그가 다시 뉴욕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한시간동안 공원 벤치, 센강, 유람선, 노틀담 성당, 자동차 안, 셀린느의 집을 이동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인생에서 사랑과 행복, 상처와 고통, 소멸과 잊혀짐에 대해서.

조용한 듯하지만 열정적인 환경 운동가 셀린느와 여전히 철학적이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제시(사랑보다는 신뢰와 의무감으로 결혼해 4살박이 아들이 있지만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들이 5분이 넘도록 롱테이크로 속사포같은 대화를 나눠도 엄청 집중이 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이 영화에 빠져듦을 느낀다. 처음에는 기억나지 않는 척 하던 셀리느(우리가 섹스를 했었나하고 모른체하던 그녀, 사실은 너무 보랏빛 콧수염까지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가 사실은 제시를 잊지 못하고 깊이 상처받고 있었다는 것은 그녀의 자작곡 노래 'A Waltz for a Night'를 들어도 잘 알 수 있다.


이들의 첫 만남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고, 나는 두번째 만남에서 그게 깨질까 두려웠다.(마치 피천득의 '인연'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마술처럼 그 우려를 가뿐하게 뛰어넘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자신들의 이야기로 소재로 만든 노래를 불러주는 셀린느와 그녀의 왈츠, 그리고 그의 깊은 시선. '비행기를 놓치겠어'라던 셀린느의 말에 제시가 던진 조용한 한 마디.'I Know'. 그가 남기는 마지막 여운은 이들의 이들의 세번째 만남을 기대하게 만든다.

장담하건데, 영화를 보고나면 비엔나와 파리를 가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칠 것이며,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영상과 이들의 유려한 대화가 담긴 DVD 세트를 구매하고 싶은 충동이 불끈 쏟아오를 것이다. 


제시의 셀린느의 인상 깊은 말들

셀린느: 사람들을 볼 땐 세세한 것에 신경쓰기 때문에 그들의 개성을 알 수 있어. 그게 날 동요시키고 날 혼란스럽게 하고 언제나 그리워 하게 만드는 거야. 너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 될 순 없어.

제시: 내 말은 너희 할머니가 일주일 더 늦게 돌아가셨거나, 아니면 우리가 일주일 더 먼저 만나기로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 삶은 정말 많이 달라졌을거야.

제시: 요즘 와선 모든 것은 영원치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 나이가 들수록 삶이 소중하다는걸 느끼게 돼. 인생은 한번뿐이니까.

셀린느: 추억은 감당할 만큼만 아름다우니까.

제시: 난 나이를 먹는 게 좋아. 잘 모르겠지만 뭔가 와닿는 느낌이 들어. 사물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아.

셀린느: 나를 먹여살려줄 남자는 필요없지만 나를 사랑해줄 남자는 필요해.

셀린느:  행복이란 원하는 무언가를 얻었느냐에 달려있는게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냐에 달린 거니까요.

셀린느: 난 아무도 쉽게 잊은 적 없어. 누구나 저마다 특별함이 있거든. 누가 떠난 빈자리는 새 사람을 만나도 그대로 남아. 상실된 사람은 상실된 거야.

셀린느:
너와 보낸 그날 밤 내 모든 로맨티시즘을 쏟아부어, 내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네가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버린 것 같아.

셀린느: 내가 사귄 남자들은 다 결혼했어. 나랑 끝나면 결혼하더라. 그리고는 전화해서 고맙데.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줘서. 나쁜 자식들. 왜 내겐 청혼 안 해? 거절했겠지만!

제시: 늘 꾸는 꿈이 있어. 나는 플랫폼에 서 있고 너는 기차를 타고 내 곁을 스쳐가. 스쳐가고 스쳐가고 또 스쳐가지. 땀 흘리며 깨어난 나는 또 다른 꿈을 꿔. 임신한 네가 벌거벗고 내 옆에 누워 있어. 너는 싫다지만, 어쨌든 난 너를 만지지. 네 피부가 너무 부드러워서 울면서 깨어나면, 아내가 날 보고 있어. 그녀는 100만 마일은 떨어져 있는 것 같아.

제시:  복권 당첨자와 전신마비 환자를 관찰한 연구 결과, 닥친 상황은 서로 극과 극인데 6개월 뒤에는 양쪽 모두 본래 성격으로 돌아가더래. 명랑한 사람은 휠체어를 탄 명랑한 사람으로 살고 뒤틀린 인간은 캐딜락과 요트 가진 뒤틀린 인간으로 살더래.


[사족] 지적이고 아름답고 청순한 줄리 델피, 여자가 봐도 정말 멋지다. 그리고 에단 호크의 그 깊은 눈빛..근데 실제로는 줄리가 에단호크보다 한 살 많군요.

비포 선셋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2004 / 미국)
출연 에단 호크,줄리 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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