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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Story

인생과 사랑에 대한 담론 - 사랑을 카피하다(2010)

by 미돌11 2011.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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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영화를 보러 시네큐브 광화문을 들어선 것은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었다. 달콤한 5월의 평일 하루 휴가가 주어졌고,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획을 짜아하게 계획했다. 먼저 한가한 오전 시간, 북촌 한옥마을을 거닐며 고즈넉한 산보를 즐기다가 삼청동 쪽으로 빠져서 커피와 책, 인터넷이 함께 하는 북카페를 찾아 나의 정신을 맑게 정리한 뒤 누군가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삼청동의 봄을 만끽하며 거리 쇼핑을 한다. 사고 싶은 치마나 새로운 신발을 살만한 가게도 점찍어놨다. 그러다 광화문까지 걸어와 교보문고에 들러 사고 싶은 책을 몇 권 산뒤 시네큐브 광화문에서 영화를 한편 본다. 이것이 나의 완벽한 휴가 플랜이었다.

여기서 어긋난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바로 화창할 거라 예상했던 날씨가 아침부터 꿀꿀하더니 점심무렵부터 급기야 비를 뿌리기 시작했고, 준비해온 화사한 꽃무늬의 접이식 우산 살이 꺾어져버려서 편의점에서 시커먼 2단 우산으로 갈아타야했다는 것 정도. 


어찌됐건 대략 계획대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휴가의 마지막 코스인 시네큐브 광화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4시 35분에 상영하는 '사랑을 카피하다'는 제목의 난생 첨 들어보는 오묘한 영화였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이란 출신의 감독이자 사진 작가인 압바스 키에로스타미의 작품이고 줄리엣 비노쉬라는 프랑스가 사랑하는 배우가 주인공이라는 것이었다.

생수만 반입됩니다. ^^


이 영화를 보고나면 두가지 정도가 특징적인데, 하는 대부분 이 두사람의 대화로 영화가 이뤄진다는 점과 이탈리아의 시골 관광지인 투스카니의 아름다운 풍광이 주 배경이라는 점이다. 제목을 보고 달콤한 연애 영화 쯤으로 생각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복제와 원형'이라는 그리 가볍지 않은 인생의 담론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투영되어 있지만 대화는 팽팽하게 이어져 긴장감이 있고 멋진 노년의 남녀를 보는 것도 즐겁다.
 
'기막힌 복제품’이란 책으로 고국인 영국에서는 큰 반응을 얻지 못한 제임스(윌리엄 쉬멜 역)가 이탈리아의 투스카니에서 '예술에 있어서의 오리지널이란?'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고, 아들의 등살에 강연 중간에 밖으로 나온 골동품상 엘르(줄리엣 비노쉬 역)는 매니저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긴다. 


저녁 9시 출발하는 기차를 예약한 작가는 강연 후 그녀의 가게로 찾아오고, 둘은 긴 자동차 운전 끝에 풍경이 아름다운 시골 관광지로 떠난다. 15년 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반항기인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녀에게 인생은 버거운 현실을 초면의 제임스라는 남자에게 마치 남편에게 말하듯이 때로는 유혹하듯이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도착한 관광지의 카페에서 이들을 부부로 착각한 카페 여주인이 그녀와 제임스를 오랜 결혼생활 중인 부부로 착각하고 엘르에게 해주는 충고('남자들은 집에 오면 입을 닫아요.'라거나)는 나에게 참 와 닿는 것 같다. 우리는 결혼생활을 막 시작했을때는 서로 숨기는 것 없이 미주알고주알 서로의 이야기를 하던 부부는 3년, 5년,10년의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면서 말이 줄어들고 비밀이 많아진다.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인생이라는 테마로 두 배우의 대화를 엮어 인생과 예술, 일상적인 철학, 사랑을 주제로 난무하는 대화(거의 토론하듯이, 싸우듯이)를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몇가지 대사를 만나게 된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 '심플하게 사는 것은 어렵다.', '아이는 현재를 즐긴다. 그럼 어때?', '장미빛 환상에 젖어 현실을 탓하는 건 바보같은 짓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을 위해 살아요.', '결혼 생활은 관심과 뚜렷한 인식이죠.', '그저 어깨에 손을 얹는 제스처로 충분하다.'라거나.

그러던 중 여자의 남편의 이야기가 나오자 여자는 작가를 마치 자신의 남편인 양 상정하고 말하고 그러자 작가는 그런 여자의 행동에 정말 남편인 것처럼 반응하면서 이들의 역할극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남자가 장단을 맞춰주는 것 같다가 나중에는 서로 역할극에 심취하고 다투는가 하면, 마지막에 여자가 남편과 첫날 밤을 묵었던 곳에까지 이르니 '어, 저 남자가 정말 남편 아닌가?'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 영화가 내세우는 "인생과 철학, 복제와 원형"이라는 인생의 다소 무거운 주제는 모두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영화 내내 거슬리는 그녀의 실크 드레스 위로 불거져나와 보이는 브래지어 끈(심지어 나중에 성당으로 들어가 벗어던져버리는),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녀가 화장실에서 덧바른 붉은 립스틱과 귀걸이를 했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다며 불만을 터트리는 모습은 정말 노골적이고 뻔뻔하기까지 하다. 
 
<사랑을 카피하다>는 엄밀히 따지면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부부인척 행세하는 이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나 뛰어나서 그들이 영화 내내 벌이는 중년 부부의 흔한 말다툼이 사실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두 사람은 성에 관한 고정관념을 연기한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이고 그녀는 로맨틱하고 감정적이다. 이렇다할 스토리나 반전도 없는 이 영화가 조금은 지루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대사 중 몇 개를 음미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인생이란 그저 어깨에 손을 얹는 제스처로 충분하나요?' ^^


사랑을 카피하다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010 / 이란,이탈리아,프랑스)
출연 줄리엣 비노쉬,윌리엄 쉬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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