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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열번째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

by 미돌11 2014.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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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1위의 기염을 토하고 있는 하루키의 10번째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었다. 2005년 『도쿄 기담집』 이후 9년 만이다. 
역시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는 소설가로 무라카미 하루키 만한 사람이 있을까? 

 하루키는 스물 몇살에 우연히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서른살 즈음에 <1973의 핀볼>을 썼다.  하루키의 정식 단편집은 10권이다.
나머지 
다른 것들은 모두 출판사에서 짜집기를 해서 내놓은 것이라 번역도 그렇고 편집도 제멋대로이다. 무엇보다 시기별 하루키의 변화를 관찰하려면 순차적으로 읽는것이 좋다. (다음은 일본어판 출시연도 기준임.) 

  1. 중국행 슬로우보트 1983
     - 오후의 마지막 잔디, 캥거리 통신, 중국행 슬로우보트
  2.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 콩트집 1983
     - 캥거루 날씨(통신) , 택시를 탄 흡혈귀, 강치축제 1963/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서른두 살의 데이 트리퍼, 치즈 케이크 같은 모양을 한 나의 가난, 스파게티의 해
  3. 반딧불이 1984 
    - 헛간을 태우다, 반딧불이, 춤추는 난쟁이 
    반딧불이는 후에 노르웨이의 숲의 모태가 됨.  "모든 사물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대하지 말것.  뿌연 공기같은 것이 남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또렷하고 단순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죽음은 생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4.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1985
      -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택시를 탄 남자, 풀사이드, 지금은 죽은 왕녀를 위한, 구토 1979
  5. 빵가게 재습격 1986
    - 빵가게 재습격, 코끼리의 소멸, 패밀리 어페어, 쌍둥이와 침몰한 대륙,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6. TV피플 1990 
    가노 크레타, 좀비, TV 피플 
  7. 렉싱턴의 유령 1996
    - 렉싱턴의 유령, 녹색 짐승, 토니 다키타니
  8.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2000 
    - UFO가 구시로에 내리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벌꿀 파이
  9. 도쿄기담집 2006 
    - 우연 여행자, 하나레이 해변, 시나가와 원숭이
  10.  여자가 없는 남자들 2014


어느새 중년의 나이를 먹은 나에게 아직도 하루키는 문득 생각나는 청춘의 노스탤지어이자 인생에 대한 물음들이다.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기는 그가 10번째 내놓은 단편 소설은 현실과 맞닿아 보편적인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나이에 걸맞은 인생에 대한 치기어린 방황이야기가 아니라 중년층까지 폭넓은 연령대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낼 것 같다.




실제로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이전의 20대 청년이 아니라 대부분 중년 남성이다.
병으로 인해 사별하거나(「드라이브 마이 카」), 외도 사실을 알게 되어 이혼하고(「기노」), 본인의 뜻으로 일부러 깊은 관계를 피하는 경우도 있으며(「독립기관」), 혹은 이유도 모르는 채 타의로 외부와 단절되기도 한다(「셰에라자드」) 등등 인생의 생기보다는 깊은 맛을 알아가는 나이의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걸작 『변신』의 독특한 오마주 「사랑하는 잠자」가 하루키다운 톡톡 튀는 상상력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예외 없이 외롭고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되는 주인공, 간간히 노골적인 섹스에 대한 묘사가 나타난다. 오래전 필요 이상으로 성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지 않느냐는 시비에 대해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럼 당신들은 집에서 당신 부인과 어떻게 부부생활을 하는데요? 그거에 비해서 제 주인공들이 심한가요?” 

이번 단편도 예외없이 하루키가 얼마전 3권 대작으로 내놓은 장편소설 『1Q84』에 몰두하다가 지쳐서 2013년 어느날 문득 ‘장편을 쓰는 것도 지쳤으니 이제 슬슬 단편들을 써보는 게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써내려간 것이라고 한다. 역시 하루키 답다. 독자들도 너무 날세워 평가하기보다는 느긋하게 슬슬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나도 평가를 자제해 보기로 한다. 



  •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건, 특히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뭐랄까, 보다 총체적인 문제야. 더 애매하고, 더 제멋대로고, 더 서글픈 거야. _「드라이브 마이 카」, 37쪽 

  •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속속들이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예요. 상대가 어떤 여자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가후쿠 씨만의 고유한 맹점이 아닐 거예요. 만일 그게 맹점이라면 우리는 모두 비슷한 맹점을 안고서 살아가고 있는 거겠죠. _「드라이브 마이 카」, 50쪽

  •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가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결국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_「드라이브 마이 카」,51쪽 

  • 시간의 속도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어긋날 수 있어.「예스터데이」, 96~97쪽

  •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생각건대 그 여자가 (아마도)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거짓말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물론 의미는 얼마간 다르겠지만, 토카이 의사 또한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사랑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타율적인 작용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자기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고, 그래서 불합리한 힘에 휘둘리는 기분이 든다.  _「독립기관」, 145~146쪽

  • 열일곱 살의 내가 그의 어떤 점에 그토록 깊이 빠졌었는지, 그것조차 잘 생각나지 않아. 인생이란 묘한 거야. 한때는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이는 거야. 내 눈이 대체 뭘 보고 있었나 싶어서 어이가 없어져. _「셰에라자드」, 211~212쪽

  • "상처받았지, 조금은?" 아내는 그에게 물었다. "나도 인간이니까 상처받을 일에는 상처받아."기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반은 거짓말이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 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_「기노」, 265쪽

  • 눈을 떴을 때, 그는 침대 위에서 그레고르 잠자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 이곳이 어디인지,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잠자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이제 그레고르 잠자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잠든 사이 누군가가 그의 귓가에 몰래 속삭였는지도 모른다. “네 이름은 그레고르 잠자야”라고. _「사랑하는 잠자」, 275~277쪽

  •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_「여자 없는 남자들」, 327쪽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변화하는 하루키의 생각을 만나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도 그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나도 그처럼 인생에 대한 관점이 조금 성숙해진걸까...  ★★★★☆


[덧]
1)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말에 많은 독자들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걸작 단편집을 떠올리겠지만 실은 보다 즉물적인, 말 그대로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자를 떠나보낸 남자들, 혹은 떠나보내려 하는 남자들. 

2) 하루키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하는 가수 윤종신이 동명의 곡 〈여자 없는 남자들〉을 ‘월간 윤종신’ 8월호를 통해 발표했다. 윤종신이 하루키의 광팬이었다니 몰랐네~ 하루키상은 자신을 알지도 못한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출간 기념 음악도 만들고, 아이스버킷 타자로 지목하기도 하고...팬심이 멋지네요 ^^ , 마지막 엔딩에 정우성 얼굴 보고 깜짝 놀라지 마시길 ㅎㅎ


여자 없는 남자들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8-2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설령 그...
가격비교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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