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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에세이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by 미돌11 2013.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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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라디오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의 젊은 여성 타겟의 패션주간지 <앙앙>에 1년간 연재한 50편의 에세이를 묶어 책으로 낸 것이다. 환갑을 넘긴 작가가 젊은 이들의 눈 높이에 맞는 생기발랄하고 귀여운 느낌마저 드는 이런 에세이를 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가 존경스럽다. 매주 마감의 압박에 시달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 내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었을 하루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지난해 8월,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요상한 제목의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에세이를 내놓더니 벌써 올해 5월에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가 번역되어 한국에 나오다니...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루도 빠짐없이 책상 앞에 앉아 묵묵히 글을 써대는 부지런한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나이가 들면서 하루키 수필의 소재가 점점 줄어들어 아쉬운 기분이 든다. 예전에는 연애, 소녀, 섹스, 사랑에 대해서 주로 얘기했다면 요즘들어서 보면 고양이, 개, 음식, 술, 마라톤, 채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싱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사소하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만 끝도 없이 해대는 그가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 과연 이런 신변 잡기적인 수필을 쓴 사람이 얼마 전까지 <1Q84>라는 3권의 장편 소설을 심각하게 써낸 그가 맞단 말인가? 

역시 이번에도 작가는 그런 독자들을 의식해 이런 이유를 서문에 내세우고 있다. 

에세이를 연재하다보면 ‘꼭 쓰게 되는’ 토픽이 몇 가지 나온다. 내 경우, 고양이와 음악과 채소 이야기가 아무래도 많다. 역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는 것은 즐거우니까. 기본적으로 싫어하는 것, 좋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기로,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다. 읽는 분들 역시 ‘이런 건 진짜 싫다. 짜증난다’ 하는 문장보다 ‘이런 글 진짜 좋다. 쓰다보면 즐거워진다’ 하는 문장 쪽이 읽고 나서 즐거우시죠? 으음, 그렇지도 않으려나?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채소를 좋아한다. 여자도 꽤 좋아하지만, 여자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 뭔가 곤란한 얘기도 나오므로(하고 슬쩍 뒤를 돌아본다), 아무래도 제한이 있다. 그런 점에서 채소는 마음 편하고 좋다.  
_p.212 ‘제일 맛있는 토마토’에서

글을 쓸 때는 되도록 독자에게 친절해야지, 하고 없는 지혜를 짜 힘을 다하고 있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 때 친절심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되도록이면 상대가 읽기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한다. 알기 쉬운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거기에 맞는 적절한 말을 골라야 한다. 시간도 들고 품도 든다. 얼마간의 재능도 필요하다.

_친절심에 대하여 P23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여러 가지를 잃어가는 과정으로 보는가, 혹은 여러 가지를 쌓아가는 과정으로 보는가에 따라 인생의 퀄리티는 한참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뭔가 좀 건방진 소리 같지만.

_115 즐거운 철인3종 경기

내가 쓴 문장이 아니어도 된다면, (묘비명으로) 이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그저 바람을 생각해라'
트루면 카포티의 단편소설 <마지막 문을 닫아라>의 마지막 한 줄, 옛날부터 이 문장이 몹시 끌렸다. 내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도 이 문장을 염두에 두고 붙인 제목이었다.

_P139 내가 죽었을때는

나이를 먹어서 젊을 때보다 편해졌구나 하는 일이 찾아보면 의외로 많다. 예를 들어 '상처를 잘 입지 않게 된 것'도 그중 하나다. 생각해 보면 그건 곧 우리의 감각이 둔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상처를 입지 않도록 두꺼운 갑옷을 입거나 피부를 탄탄하게 하면 통증은 줄지만, 그만큼 감수성은 날카로움을 잃어 젊을 때와 같은 싱싱하고 신선한 눈으로 세계를 볼 수 없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그런 손실과 맞바꾸어 현실적 편의를 취하는 것이다.  뭐, 어느정도 불가피한 일이긴 하지만.

_ P.145 낮잠의 달인  


두번째에 이어 세번째에도 오하시 아유미의 일러스트가 하루키의 글을 더욱 맛깔나게 돋보여주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느낌의 그림으로 담백한 하루키 에세이의 느낌을 더울 잘 살려주고 있다고나 할까. 암튼 잘 어울린다. 하루키의 오랜 파트너인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는 일상의 연금술사다운 면모를 맘껏 과시한다. 우리가 매일 겪는 지루한 일상에 하루키 현미경을 갖다대면 새로운 시선으로 변한다. 여행을 갈 때 버릴만한 오래된 물건을 갖고가서 버리고 짐을 가볍게 하고 온다거나 신호 대기 중에 양치질을 한다는 엉뚱한 생각이나 내 생애 최고의 토마토를 먹었던 순간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맛깔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의 재주가 참 부럽다.

하루키 개인에 대한 정보도 꽤 쏠쏠하다.

캔맥주보다 병맥주를 더 즐긴다거나, 죽을 때 쓰고 싶은 묘비명이라든가, 오믈렛을 만드는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라든가, 텔레비전에 출현하지 않는 이유라든가, 뭉크의 작품 <멜랑콜리>의 주인공과 닮았다거나, 점쟁이 경력이 있다든가,낮잠 자기를 즐긴다거나 나랑 똑같은 소띠 산양자리 A형이라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뭉크 - 멜랑콜리(질투) : 1891 

 책을 넘길 때마다 책갈피처럼 맨 하단에 한줄 씩 쓰여 있는 단문을 읽는 맛도 쏠쏠하다.

  •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내가 어디 있는지, 지금이 언제인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은근히 좋습니다.
  • 한가할 때 러브호텔 이름을 곧잘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같은 거 괜찮지 않나요?

이제 더이상 하루키의 에세이도 젊은 시절만큼 반짝이지는 않지만, 조금 느슨해진 것도 그 나름대로 맛이 있다. 내가 같이 나이를 먹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무라카미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추고 듣는 기분으로 읽어보기를 권한다. 뭐 당신과 주파수가 맞지 않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비채 | 2013-05-0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설보다 흥미로운 전설의 에세이 '무라카미 라디오' 완결판!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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