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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결혼' 그 이후

by 미돌11 201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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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는 첫 눈에 만나 사랑에 빠지고 실망하고 헤어지거나 혹은 잘 풀려 결혼에 골인하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차고 넘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혼한 이후 이들이 행복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결혼 = 해피엔딩'이라는 등식이라도 있는 것일까? 

결혼 10년 차인 나에게 연애보다 10배, 100배 힘든 결혼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그렇게 무모하게 결혼을 결정할 수 있었을까? 이 시대는 왜 이렇게 결혼을 권장하는 것일까? 혹시 나는 이 사회에 속아서 결혼을 한 것은 아닐까? 

사랑해서 결혼한 그들은 모두 어디에 살고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작가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다.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사랑 예찬론자였던 알랭 드 보통이 어쩜 이토록 현실적이고 섬세하고 잔인하게 결혼에 대해서 쓸 수 있었을까. 

그도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 두 아이(여섯살, 여덟살)를 키우면서 '아이들의 태어났을때 매우 행복했지만, 그후 아이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조금 덜 행복했다'고 할만큼 육아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었다. 세계적인 작가인 알랭 드 보통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인지 정말 궁금했고 내가 품고 있는 이 고민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애초에 우리는 결혼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갖고 있었고, 인간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두 주인공인 벤과 엘로이즈는 서로 열렬히 사랑해 결혼했고, 남편인 벤(40대 초반)의 관점에서 가정 생활, 양육, 사랑과 섹스, 외도,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고민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담담히, 조금은 암울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한편으로 아내 엘로이즈의 관점도 궁금하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은 자잘하게 싸웠고 보름에 한 번은 대판 싸웠으며, 섹스는 육주에서 10주에 한번, 즉 일년에 여섯번 밖에 하지 않는 보통(?)의 부부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우연히 만난 베키와의 하룻밤 외도를 통해 죄책감을 느끼며 다시 가정으로 되돌아가는 벤의 모습을 통해 우리나라 중년 부부의 초상을 엿보는 듯하다.     

결혼이 사랑의 종착점이 아니라 18세기 이후 어느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경제계급인 '부르조아'가 정서적 욕구와 현실적 한계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기위해 '영원을 서약한 단 한 사람에게 합법적으로 투자하여, 그로부터 최대의 성과를 거두고자 갈망하기'라는 해석은 가히 충격적이다. 결국, 우리의 결혼 생활은 고된 양육과 상당량의 가사일이 부여된 또 하나의 '노동'이었던 셈이라니......

19세기 유럽의 위대한 두 소설 '안나 카레니나'와 '보바리 부인'의 삶이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지만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 갇힌 두 여인이 자실함으로써 '서로 융화될 수 없는 요소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새로운 사랑 모델의 모순적 특징을 극명하게 드러낸 예'라고 한 해석도 쇼킹하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갖는 '행복한 결혼'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희박한 꿈인가를 냉정하게 해부하고 있다. 여느 소설과 달리 특별한 스토리 없이 잔잔하고 밋밋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결혼에 대해 이처럼 명료한 통찰을 제공해 준 책이 없었다. (근데 이게 영국 이야기 맞아 싶을 정도로 한국과 비슷하다.) 

보너스로 육아에 대한 그의 섬세한 조언도 무척 큰 도움이 된다. 아이를 대하는 방식, 자녀의 양육 방식, 육아의 고달픔, 가장으로서의 중압감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큰 용기를 필요로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지 모른다. 작가의 말처럼 이것이 '진지하고 성숙한, 조심스럽지만 보다 희망적인 답이 되길 바랄 뿐이다.' 

오죽하면, 무라카미 하루키조차도 결혼에 대해서 "냉엄한 상호 사상(寫像)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했을까. 결국 결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환상보다는 스스로 어떻게 결혼을 통해 행복해질 것인가 하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 아닐까? 


이렇게 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특유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게 전념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관심한 사람을, 미지의 운명 혹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힘겨움을.

그리고 직시하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연인들의 첫번째 기대가 실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랑은 최대의 시련과 맞닥뜨린다는 사실을. -「사랑의 본질」 p.19


종종 냉소주의자들은 행복한 결혼은 신화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치부하고 단언할 수많은 없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긴 해도, 궁극의 결혼은 분명 존재한다. 결혼이 우리의 소망에 부응하지 말아야 할 형이상학적인 이유 같은 건 없다. 다만 상황이 우리에게 몹시 불리할 뿐이다. -「감정과 이성」 p.35


우리가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듣는 비판들은 대개 고통스럽지만 진실이다. 친구들 대부분이 나는 원래 참 좋은 사람인데 이렇게 죽자고 싸우는 이유는 오로지, 하필이면 바가지 긁는 저런 인간과 결혼한 탓이라고 여겨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암울할 가능성이 높다. 내 친구들은 나의 성격적 결함을 굳이 지적해줄 정도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뿐이다. -「감정과 이성」 p.44


인간이란 짬조름한 생리식염수 속을 떠도는 변덕스럽고 불연속적인 의식의 흐름에 불과하다. -「우리의 변덕스러운 생리식염수 속 자아」 p.51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누군가와 섹스를 해야 하는 과제가 문명화된 현대 사회의 개인이 사생활에서 겪는 심각한 스트레스 중 하나라고 했다. "그들은 사랑하면 정욕이 사라졌고, 정욕을 느끼면 사랑할 수 없었다." -「사랑과 섹스」 p.107


결혼한 사람이 기회 될 때마다 바람피우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사람인지를 정확히 아는 데서 오는 겸손함 때문이다. 결혼생활이 그들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통찰이다. -「정절의 어리석음」 p.126


결혼생활이 안기는 실망에 대한 해결책으로 외도를 생각하는 것은 결혼이 우리 존재 자체의 실망에 답이 되어줄 거라는 생각만큼이나 미성숙한 것이다. -「외도의 어리석음」 p.138


우리의 문화는 사랑도 믿고 일도 믿지만, 사랑을 위한 일의 가치는 믿지 않는다. 아직도 낭만적 충동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숙명적으로 끌린다. 연습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며, 만일 연습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헌신에 대한 약속이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라고 믿는다. -「사랑하는 법 배우기」 p.156


어렸을 적 그는 용을 잡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행군을 그렸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평범한 삶을 위한 용기」 p.165


아무것도 잃지 않으면서 결혼 생활의 갈등이 해결되는 상태를 원한다면 답은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태어나 살면서 수 많은 지식을 배우지만 정작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기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사랑을 하는 법, 부모가 되는법, 직장 동료들과 잘 지내는 법, 부모님과 잘 지내는 법 등등.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수많은 난관과 과제를 다 함께 헤쳐나갈 수는 없을까 .

알랭 드 보통은 친구들과 2008년 문을 연 '스쿨 오브 라이프(School of Life, 인생학교)'라는 자기 계발 학교에서는 이런 것들을 가르쳐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회사생활·인간관계·정치·여행·가족 등 일상생활에서 겪는 주제를 주요 과목으로 강연회를 열고 토론한다. 학교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함께 식사하며 토의하는 강좌, 개인 대상부터 커플 혹은 가족용, 주중 저녁, 주말, 그리고 휴가용 등 다양한 교실이 열린다고. 내가 만일 영국에 산다면 당장 신청할텐데...정말 아쉽다. [관심있는 분은 이곳으로 신청해보길: 70 Marchmont Street, London WC1N 1AB, tel 020-7833-1010, www.theschooloflife.com]

알랭 드 보통의 책만이 궁금해서 샀는데 읽고 나니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어서일까...정이현의 '한 여자' 편도 갑자기 궁금해져 주문해봐야겠다. 보통은 한국의 수많은 작가 중에서 왜 하필 정이현을 택했을까. 2년 동안 이메일을 주고받고 만나고 서로의 원고를 읽고 대화하고 수정하며 만들어낸 소설이라고 하니 이 두 소설간에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을지 내심 궁금해진다. 

==> 출판사 홍보 영상을 보니 알랭드 보통의 추천사 부분에 심리학자 하지현 님이 등장하네요 ㅋㅋ 



사랑의 기초: 한 남자

저자
알랭 드 보통 지음
출판사
| 2012-05-0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알랭 드 보통, 사랑해서 결혼한 그들의 이야기!한국을 대표하는 ...
가격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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